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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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몽~고분 시대(기원 전 300~562년)

다카야마에는 죠몽 시대의 유적이 많이 있다. 다카야마의 죠몽 문화는 신슈·도카이·호쿠리쿠 방면에서 영향을 받아, 토기에 양식을 도입하는 등 복잡하고 화려하게 발달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도노소라 유적을 비롯해 다카야마시내 각 지역에서 아름다운 토기와 이형의 석기가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는 닌토쿠 천황 65년(377년)에 히다의 료멘스쿠나가 천황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조정의 군사에 의해 토벌 되었다고 한다. 이 료멘스쿠나는 히다 대종유동에 있는 데와케히다이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며, 센코지에는 엔쿠 등에 의해 만들어진 스쿠나상이 모셔져 있다.

나라 시대(710~794년)

645년의 다이카 개신에 있어서 세제가 확립되었을 즈음, 히다에서는 뛰어난 히다 장인의 기술을 중앙정부가 수도 조영에 활용하는 제도를 만들고, 그 대신에 용(庸)·조(調)라고 하는 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 제도는 50가구 마다 10명씩이 노역으로써 할당하는 것으로, 히다에서는 매년 100명 전후가 수도에 갔다고 하며, 궁전이나 문, 사원 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만요슈」중에 히다인을 읊은 내용도 있으며, 목공 기술자로서 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수도에서 얻은 건축 기술에 의해 히다 장인의 명성은 더욱 더 높아졌다. 히다에서는 고쿠분지를 비롯해 고대 사원이 많다. 현재의 고쿠분지 본당 건물은 무로마치 시대의 건축이지만, 하층에는 나라시대의 금당 건물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헤이안 시대~전국시대(794~1568년)

헤이안 시대, 히다는 헤이가의 지배를 받아, 가마쿠라 시대에는 다카야마시 북방의 고쿠후쵸 주변으로 정치의 중심지를 옮겼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 쿄고쿠가의 하청관리 다가 도쿠겐이 분안 연간(1444~) 텐진야마성(다가산성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시로야마를 쌓아 올렸다. 그 후, 에이쇼 연간(1504~) 다카야마 마게키가 텐진야마에 성을 쌓아, 성 주변을 다카야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가 되면 히다도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열리게 되며, 그 중에서 미키씨가 히다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도야마의 삿사 나리마사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에츠젠 오노 성주였던 가나모리 나가치카에게 히다의 공략을 명한다. 나가치카는 미키씨를 공격하여, 1585년에 히다를 제압했다.


가나모리씨에 의한 번정 시대(1692~1868년)

1586년, 가나모리 나가치카는 히다국 3만 3 천석의 국주가 되며, 이 때부터 가나모리씨 6대, 107년의 정치가 시작된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는 도쿠가와가 전선에서 싸워, 미노노쿠니와 가와치노쿠니에게 각각 토지의 일부를 받았다. 히다에 입국한 나가치카는 다카야마성의 축성을 1588년부터 시작해 이후 약 16년에 걸쳐 성을 완성했다. 기록에는 「일본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훌륭한 성」이라고 남아 있다.
또한, 성과 동시에 죠카마치의 정비도 실시하였다. 성을 둘러싸듯이 돈대를 무사지로 하여, 일단 낮은 곳을 상인과 직인의 마을로 했다. 이 상인과 직인의 마을이 현재의 「옛 거리」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마을 동쪽에 사원군을 마련하여, 히가시야마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이러한 절들을 둘러 볼 수 있다. 이것과는 별개로 성과 서로 마주 보게 하는 형태로 쇼렌지(현재의 다카야마 별원)를 설치하는 등 오늘날 다카야마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다카야마에 있어서의 가나모리씨 정치는 1692년, 가나모리씨가 데와노쿠니 우에노야마로 영지를 옮김으로써 막을 내렸다.

막부 직할지 시대(1692~1868년)

막부 직할지가 된 후, 1695년에 막부로부터 다카야마성 파각 명령이 내려져 성은 해체되었다. 현재는 「다카야마 성터」로써 현 사적,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신록이 풍부한 시로야마 공원이 되었다.
1771년, 제12대 대관으로서 히다를 다스리고 있던 오하라 히코시로의 압제 정치에 의해, 햇수로 18년에 걸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소동 가운데 9천명 남짓의 농민이 처벌받아 젊은 지도자 혼고무라 젠쿠로 등 많은 농민 대표가 희생 되었다. 그러나, 군다이의 정치 부정도 추궁 당할 무렵이라 히코시로의 자식인 오하라 카메고로 군다이는 유죄를 선고 받았다. 선정을 다한 대관·군다이도 있어, 19대 군다이 오가 타테와키는 천보(天保) 기근 시에 영내에서 구제 조치를 강구했다. 또한 20대 군다이 도요타 도노신은 시부쿠사야키를 일으켜, 누에치기를 장려했다.

메이지 이후(1868년~현대)

메이지 유신 후, 정촌제의 도입에 의해 메이지 8년(1875)에 다카야마 이치노쵸손, 니노쵸손, 산노쵸손이 합병하여 다카야마쵸가 되었다.
당시 기후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이었다. 메이지 22년(1889)에 15,385명으로 새로운 마을 제도가 실시되어 다이쇼 15년(1926)에 나다무라를 합병, 쇼와 11년(1936)에 오나다쵸를 합병해 다카야마시가 되었다. 그 후, 쇼와 18년(1943)에 호즈에무라, 쇼와 30년(1955)에 오하치가무라와 합병하고, 헤이세이 17년(2005)에 근처 9정촌(뉴카와무라, 기요미무라, 쇼카와무라, 미야무라, 구구노쵸, 아사히무라, 다카네무라, 고쿠후쵸, 가미타카라무라)과 합병하여, 신다카야마시가 탄생하게 되었다.